요즈음
"오늘 저녁 경도 하실 분?"
'동심' 찾아 모이는 어른들
"혹시 경도세요?"
지난 7일 오후 8시 서울 성북구의 한 고등학교 운동장에 장갑, 목도리 등으로 중무장을 한 50여명의 사람들이 원을 그리며 모여들었다. 영하의 날씨에도 이들이 모인 이유는 딱 하나, 바로 추억의 놀이 '경찰과 도둑(경도)'을 하기 위해서였다.
최근 어린시절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즐겼던 술래잡기 놀이인 경도가 성인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다. 지역 커뮤니티 플랫폼인 '당근'을 중심으로 경도 참가자를 모집하는 글이 잇따라 올라오며 경도 모임이 활성화되고 있다. 참여 신청이 몰리면서 대기자까지 받는 모임도 적지 않은 상황이다.
모집과 운영 방식은 단순하다. 게시글에는 모임 날짜와 시간, 장소만 안내된다. 참가자 대부분이 성인인 만큼 직장인들을 고려해 모임은 주로 평일 저녁 시간대에 열린다. 모임은 주로 개방 운동장이나 공원 등에서 진행된다. 모임 당일에는 별도의 사전 교류 없이 현장에서 바로 합류하는 방식이다.
이날 현장에 모인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준비운동을 하며 몸을 풀었다. 주최자는 모임 참가자와 일반인을 구분하기 위해 야광 팔찌를 나눠주며 게임 규칙과 진행 방식을 안내했다. 설명이 끝나자 참가자들은 일사불란하게 경찰과 도둑으로 역할을 나눠 게임을 시작했다.

쫓고 쫓기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현장 분위기는 빠르게 달아올랐다. 참가자들 사이에서는 장난 섞인 외침이 오갔고, 잡는 쪽과 도망치는 쪽 모두 웃음을 터뜨리며 뛰어다녔다. 한바탕 뛰어논 사이 처음의 어색함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이날 만난 직장인 A씨(26)는 경도 모임에 여러 차례 참여한 일명 '경도 마니아'였다. 직접 모임을 주최하기도 했다는 그는 경도를 시작한 이유로 반복되는 일상에서 느끼는 권태를 꼽았다.
A씨는 "회사생활에 치여 살다 보니 술 말고는 딱히 취미가 없을 정도로 일상이 권태로웠는데 문득 어린시절 놀이터에서 처음 본 친구와도 격 없이 뛰어놀던 게 그리워졌다"며 "그때처럼 그냥 아무 걱정없이 신나게 뛰어놀고 싶다는 생각에 경도 모임을 시작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날 두 번째로 경도 모임에 나왔다는 B씨(25)는 "졸업한 이후부터는 사람을 만날 기회는 줄고 그렇다고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과정은 부담스러웠다"며 "그런데 경도는 굳이 관계를 이어갈 필요 없이 그날 신나게 놀고 깔끔하게 끝낼 수 있어 마음이 편하다"고 강조했다.
친구따라 경도 모임에 참여하기 위해 안산에서 왔다는 C씨(32) 또한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사람 만나기도 쉽지 않지만, 현생을 살다보면 관계에 에너지를 쓰는 것에 피로감을 느낀다"며 "이곳에선 체면 차릴 필요 없이 익명의 존재로 마음껏 놀 수 있는 점이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처럼 경도 모임이 인기를 끄는 배경에는 요즘 세대가 관계를 맺는 방식과도 맞닿아 있다. 비대면 소통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사람의 온기는 필요하지만, 깊숙이 얽히는 관계에는 피로를 느끼는 이들에게 경도 모임은 '느슨한 연대'를 가능하게 한다.
서로를 잘 알지 않아도 비슷한 추억을 공유하며 함께 뛰고 웃다가, 놀이가 끝나면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경도 모임은 깊은 관계를 맺지 않아도 사람과 연결돼 있다는 느낌을 준다. 부담 없이 만났다가 깔끔하게 헤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현대인의 외로움을 잠시 덜어주는 하나의 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A씨는 "경도 모임이 인기가 많아지면서 원래 취지와 다르게 이성 만남을 목적으로 모임 성격이 변하는 경우도 하나둘 보이는 것 같다"며 "어렸을 적 추억의 감정을 다시 느끼고 싶은 마음으로 온 사람들이 불편함 없이 즐기고 돌아갈 수 있는 모임으로 남았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