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루스벨트의 1달러보다 못한
국민연금의 5억원
미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으로 항상 손에 꼽히는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집권 첫해인 1933년 금주법을 폐지한다. 정부의 새로운 수입원으로 주류세를 거둬들이기 위한 목적이었는데, 이것 때문이었을까 한 잡지사에서 만평을 통해 그를 술주정뱅이로 묘사했다.
루스벨트는 명예훼손 손해배상 소송을 냈고 재판은 그의 승리로 끝났다.
손해배상으로 요구한 금액은 단돈 1달러.
이후 미국에선 종종 1달러 소송을 볼 수 있는데,
테일러 스위프트도 2017년 자신을 성추행한 한 라디오 진행자를 상대로 1달러 소송을 내 승소한 바 있다.
진실을 밝히고 이들의 명예를 되찾아준 1달러는 액면가인 한화 1400원 그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
그런데 최근 1달러보다 못한 5억원을 보게 됐다. 국민연금공단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피해를 봤다며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등을 상대로 낸 소송이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9월 이 회장을 비롯한 삼성 전현직 관계자 등 10명과 삼성물산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청구 금액이 '무려' 5억1000만원.
소송도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직권남용 등 혐의가 대법원에서 유죄 확정 판결이 난 2022년 4월 이후 2년 5개월만에, 배상 청구 기한을 3개월 앞둔 시점에 청구했다. 미국계 사모펀드 엘리엇과 메이슨의 손배소는 당시에도 재판이 진행 중이었는데, 국민 혈세로 자금을 굴리는 국민연금은 누구의 눈치를 봤는지 느즈막히 소송을 제기했다.
2015년 5월 26일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은 주식교환 방식으로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의 주식 전량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합병을 진행하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같은 해 7월 삼성물산 주총에서 제일모직과의 합병을 결의했고, 합병 비율은 1(제일모직) 대 0.35(삼성물산)였다.
합병 발표 전 2015년 기준 삼성물산 총자산은 29조원으로 제일모직의 3배, 28조원이었던 매출액은 5.5배, 6500억원인 영업이익도 3배였다.
이후 삼성물산 지분 7.12%를 가진 엘리엇과 소액 주주들이 반대했으나, 지분율 11.21%로 1대 주주였던 국민연금공단 등이 합병에 찬성했다.
이 회장은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정권 국정농단의 핵심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삼성 자금을 횡령해 86억8000만원의 뇌물을 준 혐의로 2년 6개월의 실형 선고를 받아 복역한 뒤 2022년 광복절 특사로 사면됐다.
결과적으로 두 회사의 합병으로 이 회장은 삼성물산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 4.1%를 추가로 확보했고, 지금도 그룹 경영권을 손에 쥐고 있다. 수감 당시 삼성전자 시가총액이 약 570조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남아도 크게 남는 장사를 한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 이 사건을 수사한 국정농단 특검은 국민연금 피해를 1387억원으로, 경제개혁연구소는 1137억∼1657억원, 참여연대는 5200억∼6750억원으로 추산했다.
7.12% 지분을 가졌던 엘리엇은 2023년 6월 1300억원(원금 690억원+이자) 규모의 배상 판결을, 메이슨도 1심에서 860억원(원금 438억원+이자) 배상 판결을 받았다.
11.21%로 1대 주주였던 국민연금의 손해배상 청구액 5억1000만원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5억원은 삼성전자 시총은 물론 이재용 회장의 추정 자산 15조8000억원과 비교 자체가 불가하다.
국민연금은 앞으로 소송을 진행하면서 손해배상 청구액을 늘려가겠다고 말한다. 5억원에서 시작한 청구 비용을 얼마까지 늘릴 수 있을지 지켜봐야겠지만, 엘리엇·메이슨에 배상할 돈과 국민연금 손실을 메울 만큼이 될 거라는 기대는 크지 않다.
국민연금을 운용하는 보건복지부와 공단은 매달 급여에서 꼬박꼬박 국민연금을 납부해온 우리의 명예를 훼손했다. 그들이 속죄하는 길은 다음 달 시작될 재판에 최선을 다해 납세자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이다.